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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정보

미스테리(Mystery) 바베이도스 섬의 움직이는 관(the moving coffin of Barbados)

by 동림동꿀쟁이 2022.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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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이스 볼트 

 

1. 체이스 볼트

1789년 영국의 귀족이었던 토마스 체이스 대령은 카리브해에 위치한 바베이도스 섬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시 바베이도스 섬은 영국의 식민지 아래에 있었다. 토마스는 식민지 문화를 섬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부리던 노예들과 섬의 원주민들을 혹독하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스는 본국으로부터 영국에 귀환활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된다. 권력을 이용하여 갖은 방법을 총동원해보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는 걸 깨달은 토마스는 섬에 자리 잡기로 결심하고 지하금고를 하나 구입한다. 자신 혹은 가족이 섬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 이곳에 임시로 안치하였다가 추후에 시신만이라도 영국에안장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후 지하금고는 토마스 체이스의 이름을 따 '체이스 볼트' 라고 지었다. 1807년 7월 31일 고다드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체이스 볼트에 처음으로 관이 놓이게 된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08년 토마스의 2살 된 딸 메리 앤 체이스가 비극적으로 운명을 달리하며 체이스 볼트에 두번째 관이 생긴다. 5년 뒤에는 하나 남은 딸이었던 도커스 체이스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토마스는 홀로 남게 된다. 도커스 체이스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당시 십대라는 어린 나이였다. 아버지인 토마스와는 다르게 노예들과 주민들을 살갑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도커스는 바베이도스 섬 내에서 유일하게 토마스에게 쓴 소리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주민들을 모질게 대하지 말라,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수 없다 등 그녀는 토마스와 끊임없이 맞서며 약자의 편에 섰다고 한다. 그러던 그녀는 어느 날 부터인가 집밖을 나서는 일이 줄어 들었고 정확한 사유가 밝혀지지 않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맞서기 위해 단식투쟁을 벌이다 죽은 것이다, 토마스가 자신의 딸을 가둬 놓고 굶긴 것이다 등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으나 정확히 밝혀진 사실은 없다. 자식들을 다 떠나 보낸 토마스는 그로부터 한달 뒤인 1812년 8월 9일 자택에서 자살을 선택한다.

 

2. 믿을 수 없는 현상

같은 해 영국의 관리자들이 토마스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바베이도스 섬에 방문하게 된다. 관을 안치하기 위해 체이스 볼트의 입구를 개방한 그들은 깜짝 놀란다. 제일 먼저 안치되었던 고다드 부인의 관과 체이스의 두 딸 메리, 도커스의 관이 서로 뒤죽박죽 엉킨 채로 널부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가 생전에 노예들과 주민들에게 악독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관료들은 토마스 가문에 원한을 산 노예가 벌인 일일거라 추측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관을 다시 정리한 뒤 묘당 입구를 봉쇄했다. 조금 이상한 점이라면 관의 무게가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납으로 제작된 관은 성인 남자 8명도 간신히 드는 무게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새벽 영국인 관리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누군가 다급하게 뛰어온다. 그는 체이스 볼트 인근에 살던 섬의 주민이었다. 주민은 '체이스 볼트 안에서 하얀색 섬광이 뿜어져 나옵니다!' 라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관리들은 즉시 체이스 볼트로 뛰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관리자들은 눈을 의심했다. 전날 안치해 놓았던 토마스의 관은 240도가량 기울어져 있었으며, 도커스의 관은 벽을 마주보고 90도로 꼿꼿이 서있었다. 이 사건 후로 체이스 볼트에 유령이 산다는 괴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이후 토마스의 친척들 관을 안치하기 위해 무덤을 열었을 때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1819년 체이스 가문의 또 다른 친척이었던 클라크 부인이 세상을 떠나 체이스 볼트에 안치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바베이도스의 신임 총독 스테이플턴 코튼은 이 기현상을 목격하기 위해 직접 클라크 부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리저리 흩어진 관들을 목격한다. 코튼 총독은 이를 보고 크게 분노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누군가 저지른 범죄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코튼 총독은 부하들을 시켜 묘당 바닥에 석회 가루를 잔뜩 뿌린 뒤에 입구를 봉하고 영국 정부에서 발생한 봉인서를 붙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가 관을 헤집는다면 어떤식으로든 반드시 흔적이 남게끔 말이다. 다음해인 1820년 봉인서는 뜯어진 흔적 없이 멀쩡했지만 코튼 총독은 체이스 볼트를 열어 안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총독부 관리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개방된 무덤은 이전보다 훨씬 심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납으로 된 단단한 관 모서리가 군데군데 찍혀 부서지기까지 했다. 이상한 점은 석회가루에 어떠한 발자국도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코튼 총독은 '이건 내 권한 밖의 일이다.' 라며 사건 포기를 선언하였고 임기가 다하는 1822년까지 미스테리를 해결하지 못했다.

움직이는 관들

 

3. 고국으로의 이송


상식을 벗어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섬 주민들의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동요를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한 영국 정부는 섬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책임자였던 토마스 오더슨 신부는 우선 묘당 바닥에 모래를 뿌린 뒤 관 6개를 한데 모아 쇠사슬로 묶었다. 그 뒤에 입구 문에도 쇠사슬을 감고 손잡이에는 밀가루를 뿌렸으며 체이스 볼트 주변에는 시멘트를 바른 벽돌을 삼중으로 쌓아 올렸다. 하지만 그 날 새벽 체이스 볼트 안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신고가 있었고 조사단은 바로 다음 날 모든 걸 다시 허물어 안을 확인했다. 묘당안의 상황은 심각했다. 관들은 묘당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묶어 놨었던 쇠사슬은 끊어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조사단은 결국 '원인 판명 불가' 라는 결론을 내리고 관을 영국으로 옮겨 각자 따로 이장시키기로 한다. 그렇게 수많은 사건을 일으킨 뒤 본국으로 이송된 관들은 영국에 도착한 후로 어떠한 기현상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체이스 볼트 자체에 기이한 힘이 있는 것이다. 본국으로 돌아간 토마스가 노여움을 푼 것이다 등 여러가지 말들이 돌았으나 어느 하나 명확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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