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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정보

미스테리 전설 속 황금도시 엘도라도(EL Dorado)

by 동림동꿀쟁이 2022.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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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도라도

 

 

 

1.전설 속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아 떠난 사람들

16세기 초 남아메리카 대륙 어딘가 황금으로 만들어진 도시가 있다는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된다. 이에 많은 탐험가들이 황금도시를 찾기 위해 드넓은 대륙을 여행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로 끝나던 가운데 스페인 구수 대창 후안 마리테즈가 금은보화가 넘치는 황금 도시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는 원정대를 꾸려 소문의 도시를 찾아 항해하던 중 선박의 화약창고가 폭발하는 사고를 겪게 된다. 이에 많은 부하들이 사망했고, 배 안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마리테즈는 졸지에 원정대에서 퇴출당해 버린다. 홀로 정글을 헤매던 그는 우연히 정체 모를 부족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무이스카 부족으로 외부인이었던 마리테즈를 거부감 없이 맞이해주었다. 마리테즈가 황금도시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안 원주민들은 도시로 안내해 주겠다며 그의 눈을 가린채 배를 타고 어디론가 떠났고 하는데.. 여정은 무려 15일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마리테즈는 황금도시 '마노아'에 도착한다. 그는 그곳에서 7개월동안 지냈다고 증언했다. 마리테즈는 꿈에 그리던 황금도시에서의 생활을 마친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길 결정하였고, 마노아에 들어오기 전처럼 눈을 가린채 도시를 나와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모두 눈을 가렸기 때문에 황금도시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친 채 살아가던 마리테즈는 임종 전 그의 부하 디에고 데 오르다즈에게 황금도시 마노아에 다녀왔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스페인 전역은 황금도시가 전설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의 유언을 토대로 황금도시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지도에 표기하며 그곳을 '엘도라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스페인, 영국, 독일 등 많은 유럽 탐험가들이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2. 구아타비타 호수의 저주일까?

1537년 탐험가 곤잘로 히메니스 데 케사다는 9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엘도라도를 찾아 나섰다 지금의 콜롬비아인, 쿤디나마르카를 탐험하던 도중  무이스카 부족 소수를 만난 케사다는 그들의 마을을 공격해 정복하였다. 무이스카 부족이 살던 마을이 황금도시라고 믿었으나 케사다가 정복한 부족 마을에는 금이라고 할 것이 거의 없었다. 원주민들이 금의 일부를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매우 소량이었다. 케사다는 부족이 숨겨놓은 마을이나 금 광맥이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들은 고문하였다. 원주민들은 소문은 모두 가짜이며 금은 모두 의식하는데 쓰여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케사다는 어디서 무슨 의식을 하였는지 재차 물었고, 고문에 버티다 못한 족장은 이렇게 실토한다.  '우리 무이스카 부족은 족장이 바뀔 때마다 구아타비타 호수에서 의식을 치른다'  '새로운 통치자가 벌거벗은 몸에 금칠을 하고 각종 금과 보석을 뗏목에 올려 호수 한가운데로 가면 신하들도 준비해온 금을 모두 호수 밑으로 던진다'  '그것은 호수안에 존재하는 악마에게 재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의식이며 우리 부족은 그 악마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케사다는 곧바로 구아타비타 호수로 찾아갔고 근처에서 금들을 몇개 찾아낸다. 하지만 호수안으로 들어가 금을 회수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는 원주민들을 더 고문하여 금을 얻은 곳을 실토하게 하려 했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케사다는 마리테즈가 말한 황금도시는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원정대를 이끌고 탐험을 철수한다. 그 후, 그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나병에 걸려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무이스카 부족이 숭배하는 호수의 악마가 내린 저주 때문이었을까?? 몇년이 흐른 1541년 스페인 탐험가 피사로와 프란시스코 형제가 군사를 이끌고 무이스카 부족 마을을 찾아간다. 그들은 부족을 공격하여 엘도라도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작전을 실행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원주민들을 협박했지만  황금에 대해 실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악마의 보호를 받는다고 믿어서 인지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역으로 피사로 군대를 공격하여 군대를 장악한다. 결국 피사로 형제는 구아타비타 호수에서 참수형을 당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1559년, 젊은 귀족 페드로 데 우르수아는 황금도시 엘도라도를 찾기 위해 스페인 군인 400명과 수백 명의 인디언을 데리고 무이스카 부족을 찾기 위한 탐험을 떠난다. 탐험에 참여하였던 인원 중에는 전쟁 경험이 많았던 로귀 드 아키레 라는 군인이 있었는데 그는 탐험대가 무이스카 부족 마을에 도착하기 전 돌연 지휘관이었던 우르수와를 살해한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이에 스페인을 증오하여 자신만의 독립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스페인 군대에 붙잡혀 처형을 당하게 되면서  짧았던 꿈을 마무리 짓는다. 이 역시 구아타비타 호수의 저주일까? 

 

3. 호수속에서 나온 황금, 옥, 에메랄드

이후에도 스페인을 제외한 영국과 독일에서 여러 번 엘도라도를 찾기 위한 탐험이 이어졌다.  하지만 대부분이 탐험 중 부족들에게 죽음을 맞이하거나 빈손으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영국의 정치인이었떤 윌터 롤리 경은  탐험 중 무이스카 부족에게 친밀하게 접근하여 엘도라도의 위치를 알아냈다며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수백 명의 군사와 말 수십 대의 선박을 지원받기도 하였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와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스페인 당국은 엘도라도를 찾는 것에서 구아타비타 호수 안을 뒤지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무이스카 부족의 말대로라면 호수 안에는 산더미 같은 금이 쌓여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가 무이스카 부족을 약탈하고 식민지화 한 뒤에 호수에 물을 배수하여 안에 들어있는 황금과 보물을 꺼내기로 한다. 첫 배수 시도는 인디언들과 노예를 앞세워 양동이에 물을 채워 버리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3개월 동안 이어진 배수 작업에도 호수의 수위는 고작 3미터만 낮아졌다. 당연하게도 황금 수확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두번째 시도는 1580년에 이루어졌다. 그들은 호수 측면에 큰 홈을 잘라내 물을 빼려는 시도를 하였고 실제로 수위를 20미터 낮추는데 성공하며 일부 금과 보물을 회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로의 벽이 얼마 못 가 무너졌고 많은 노예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2차 시도도 실패로 끝나게 된다. 결국 스페인 당국은 호수의 물을 전부 빼낼 방법을 찾지 못하였고 2세기 동안 아무도 구아타비타 호수에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200여년이 흐른 1898년 영국의 엔지니어 겸 탐험가인 히틀리 노울스의 지휘하에 구아타비타 호수의 물을 수심 120cm만 남기고 모두 배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호수 바닥의 모래와 진흙이 콘크리트처럼 단단해져서 밑바닥을 채굴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노울스는 침수되지 않았던 보물들만 회수하였는데 그 양만 해도 꽤 되었다고 한다. 거기엔 다량의 황금 뿐만 아니라 레머랄드, 호박, 옥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12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를 통해 약 2만달러 상당의 보물을 구아타비타 호수에서 찾았다고 말하였다. 노울스는 인터뷰하던 기자에게 이런 말을 전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직 바닥을 파헤치지 않았다. 그 아래에 얼마나 더 많은 금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전설속의 엘도라도는 바로 이 곳 구아타비타 호수이다' 전설속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는 실존하는 도시가 아닌 구아타비타 호수를 말하는 것일까? 노울스의 성공적인 보물찾기 이후 몇 번의 탐사가 더 이어졌지만 1965년 콜롬이바 정부가 호수를 국가 유산으로 지정하며 몇 백 년간 이어지던 엘도라도의 전설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 발굴된 보물중 일부는 콜롬비아의 수도인 보고타의 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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