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스테리 정보

미스테리 이제야 밝혀지는 소름돋는 이야기(A story that finally comes to light)

by 동림동꿀쟁이 2022. 7. 11.
반응형

타이타닉 호

1. 타이타닉 호

타이타닉의 첫 항해 14년 전인 1898년 작가 모건 로버트슨은 타이탄의 난파선이라고 불리는 소설을 쓰고 출판하였다. 그 책은 타이탄이라는 이름의 해양 정기선이 빙상과 충돌한 후 북대서양에 가라앉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책 속에서 타이탄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배이며 인간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일급 호텔과 맞먹는 내부시설 그리고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내구도를 가진 배로 묘사되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로버트슨은 타이타닉의 흥망성쇠를 예측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역사적인 우연은 당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롭고 흥미롭다. 비록 이 소설은 타이타닉이 디자인되기 전에 쓰여졌지만 소설과 실제 사건 사이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유사한 점이 있다. 두 배 모두 영국 소유의 강철 선박으로 길이가 약 800피트였고 4월 자정 무렵 북대서양의 빙산에 부딪힌 후 침몰했다. 그리고 둘 다 승객들을 위한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않았다. 타이탄은 침몰할 수 없는 배로 여겨졌기 때문에 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구명보트만 실려 있었고 그 보트에는 약 500명의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다. 약 2000명이였던 승객들에게는 충분하지 않은 크기이다. 타이탄은 이렇듯 타이타닉호와 비슷한 크기와 속도로 묘사되었고 둘 다 침몰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 재난을 예언할 걸까? 로버트슨은 이 유사점들이 선박과 해상 동향에 대한 자신의 폭넓은 지식의 결과일 뿐이라고 항의하며 진부한 비난들을 부인했다. 모건 로버트슨은 타이타닉호 침몰 후 그의 소설을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를 준 채로 다시 출판했는데 이런 행위는 타이타닉 침몰이라는 비극을 이용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타닉과 소설 속 타이탄의 유사성은 현재에 이르러서도 놀랍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연치고는 너무 비극적이다. 로버트슨의 소설은 타이타닉 사고를 막지는 못했지만 23년 후의 비슷한 상황에 처한 또 다른 배는 덕분에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1935년 영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부정기 화물선의뱃머리에서 윌리엄 리브스라는 젊은 선원이 바다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는 오늘이 타이타닉이 침몰한 날짜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위험경고를 소리 높혀 외치며 선실 타수에게 각별히 조심할 것을 요청했다. 엔진 전속 후진 벨이 울리고 배는 거세게 요동치면서 잠시 멈춰 섰다. 아니나 다를까 어찌된 우연인지 칠흑 같은 어둠 속 불과 몇 미터 앞에 거대한 빙산이 버티고 있었다.

 

2. 후버 댐

20세기 내내 기술자들은 블랙 캐니언과 그 근처의 볼더 캐니언이 수력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댐을 지탱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콜로라도 강은 그 계획을 이뤄낼 이상적인 소원이었다. 이 거창한 프로젝트는 빠르게 진행되었고, 1928년에 공사를 시작한 후버 댐은 1936년 예정보다 2년 일찍 완공되었다. 말이 쉬워보일 수 있으나 이 프로젝트는 미국 공학의 가장 훌륭한 사례 중 하나로 남을만한 사례였다. 이런 후버 댐은 많은 건설 비화를 가지고 있지만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건설 노동자들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후버 댐 역시 건설 과정에서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후버 댐 건설 중 산업재해로 인한 공식 사망자 수는 96명이다. 역사학자들은 실제 수치는 더 높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이 발전소를 둘러싼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존 그레고리 티어니라는 이름의 남자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885년 미주리주 피드몬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하드록 광부로 경력을 쌓았다. 그의 화려한 경력은 후버 댐 건설사업에 참여하게 해주었고 이 불행한 남자는 1922년 12월 20일 댐 걸설을 위한 이상적인 장소를 찾다가 익사했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기 까지는 거의 2주가 흘렀고 그의 시신은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12살의 어린 아들 패트릭 티어니도 있었다. 슬픔에 잠긴 패트릭의 어머니는 그와 함께 미주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패트릭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스프링필드 지역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패트릭은 미래의 아내를 만났다. 이후 젊은 가족은 일자리를 찾아 서쪽으로 향했지만 심해지는 불황속에 점점 살기 어려워졌다. 결국 일자리를 찾던 패트릭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고자 후버 댐 근방의 전기기술자로 취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35년 10월 20일 전기기사 한 명이 애리조나 쪽의 두 개의 취수탑중 하나에서 320피트 떨어진 곳에서 사망했다. 후버 댐 건설사업 공식 사망자 명단 중 마지막 사망자였다. 그리고 사망한 전기기사는 패트릭 티어니였다. 그의 아버지는 건설사업에서 첫 번째 사망자였고 패트릭은 댐이 가동되기 전에 마지막 사망자가 되었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후버 댐 발전소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알려지며 한 부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로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다.

반응형

댓글